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153 / 백서향

풀빛세상 2013. 1. 31. 15:59

 

 

 

  

 

날씨가 좋으면 서향 아씨 만나러 갑시다.

서향 아씨가 벌써 피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요. 혹시 알고 있나요?

육지에서는 혹한주의보가 내렸다고 하는 1월의 하순, 남쪽 섬나라에서는 벌써 꽃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뜻이 맞은 중년의 사내 둘이서 카메라를 메고 길을 나섰습니다.

서향 아씨를 만나겠다는 설렘과 두근거림을 안고요.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아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 정보를 얻은 후 제주의 곶자왈로 들어섰습니다.

 

곶자왈은 화산재가 쌓이고, 그 위로 숱한 세월이 흘러 숲을 이루게 된 지역이지요. 구멍이 숭숭하고 자잘한 화산재들이 켜켜이 쌓였기에 겨울에는 땅 속에서 습기를 머금은 따뜻한 열기가 올라 오고, 여름이 되면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 사시사철 기온의 변화가 크지 않습니다. 참 신비로운 곳이지요. 흔히 제주의 허파라고도 합니다. 옛날에는 버려진 땅이었지만 요즘은 희귀한 생물들의 보고요, 생태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의 논리는 이 땅을 욕심내고 있습니다. 불도저와 굴삭기로 한 번에 밀어버리고 그 안에 뭔가를 짓고자 합니다. 골프장을 만들고, 대규모 관광단지를 만들고.... 그리고 온갖 놀이시설을 갖다 놓으려고 합니다. 수십 수백만년의 침묵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숲이 하루 아침에 뭉개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직 너무 이른 철이었습니다.

우리의 무릎 높이 혹은 아무리 키가 자라도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는 백서향 나무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만, 춥고 흐린 날씨 탓인지 꽃몽우리들은 닫혀 있었습니다. 혹시나 한두 그루라도 철이른 꽃이 없을까 두리번 두리번거렸지만 꽃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다음에 날씨 좋은 날 다시 찾아와야겠습니다.

돌아서기 아쉬워 마지막으로 숲길을 한 바퀴 빙 돌았을 때, 새하얀 꽃 몇 송이가 침침한 숲속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던 백서향이었습니다.

 

백서향, 제주의 숲속에서 자생하는 우리의 꽃입니다.

옛날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서향은 담자색꽃을 피우게 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 향이 천리를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고도 하지요. 이들은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남쪽 지역과 섬에서 자라게 되며, 그 향을 즐기는 사람들은 화분에 담아 키우기도 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자연에서 온갖 비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피어나는 꽃들과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요?

 

추운 겨울이 지나갈 즈음에 순백의 꽃과 짙은 향은 보는 이의 정신을 맑게 합니다. 옛날에는 흔했었는데 사람들이 탐을 내어 캐가는 바람에 지금은 자취를 거의 감추게 되었답니다. 옛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정신은 황폐해지게 되는 걸까요? 그냥 그대로 두면 좋을 것을 왜 자기네 집 마당으로 옮겨갈까요? 그대로 두어 자연의 꽃밭을 다함께 즐기면 안 될까요? 그렇게만 한다면 드넓은 숲이 다 나와 우리의 정원이 될터인데요.

 

백서향을 만나고 온 날, 백설공주와 왕자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저 숲에서 오래 오래 살아오면서 철마다 새하얀 꽃을 피우는 백서향 아씨는 백설공주일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백년 동안의 깊은 잠 속에 빠져있는 백설공주를 깨워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백마를 탄 왕자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면 갈수록 그네들은 더 힘들어 하거든요.

우리는 그네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네들은 '제발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꽃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모습을 동행했던 꽃친구님이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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