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억새를 찍을 수 있는 곳으로 갑니다. 카메라를 메고 졸레 졸레 뒤따르는 우리는 신이 났지요. 철문과 철조망이 떡 버티며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 억새밭이 있다기에. 야트막한 오름 위로 가을의 태양이 걸렸습니다. 한낮동안 높고 높은 하늘을 건너왔지요. 이제 숨 헉헉거리며 마지막 붉음을 불태우는 순간, 하늘도 땅도 우리의 가슴도 붉음과 먹먹함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렇지만 뻥 뚤려 있는 도로, 시야를 불편하게 만드는 철조망, 파헤져진 흙더미,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굴삭기의 부품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아직은 사이 사이로 억새들이 나부끼고 있었기에.
신대륙 아메리카를 질주하던 버팔로 떼들을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 용맹스러움, 우직함, 온순함, 질주의 본능,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 보지만, 드넓은 초원을 내달리며 땅을 진동시켰던 버팔로 무리들을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네들을 뒤쫓던 용맹한 인디안 전사들의 구릿빛 육체들도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네들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한 장의 사진에 개발과 보존이라는 제목을 붙여봅니다. 내년에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찍을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 메마른 바람 소리의 대답이 돌아옵니다. 수년이 지나면 드넓었던 초원, 억새들이 지천으로 깔렸던 이곳의 풍경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는 골라 다니면서 풍경을 찍었는데, 이제는 찍을 곳이 없어요. 예전에는 육지에서 연락이 오면 자신있게 안내를 했는데, 이제는 안내할 곳이 없어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분의 말소리는 메말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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