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141 / 산수국

풀빛세상 2012. 7. 4. 21:51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펜티엄 컴퓨터가 가난한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절, 새내기 캠퍼스 커플이 주고받았던 애틋한 첫사랑의 이야기였습니다. 맑고 고우면서도 상처를 만들어가는 풋사랑의 아릿한 이야기를 보면서 푸푸 웃어보았습니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을 영상들이 누구에겐들 없을까요.

 

"선배님,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요?"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다짐하는 말이었을까요. 캠퍼스 새내기로 들어온 그녀는 유난히 선배를 많이 따랐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도 손 한 번 제대로 꼬옥 쥐어보지 못했던 우리들의 사랑은 물색이었습니다. 맑은 눈웃음의 그녀는 잘 살고 있겠지요.

 

산수국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한결같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너무 맑다".

 

산에는 꽃이 핍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을 바꾸어가면서 꽃이 핍니다. 봄에는 봄꽃, 여름에는 여름꽃, 가을에는 가을꽃, 겨울에는 눈꽃이 피어납니다. 맑고, 곱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소박하고••• 조심스럽게, 혹은 날 좀 봐요 하듯이 나대기도 하면서. 그 많은 꽃들 중에 서럽고도 고운 물색의 산수국도 피어납니다. 몇 년 동안 산수국이 피는 철이면 꽃앓이 비슷한 것을 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다, 파도소리, 물새들의 끼룩거리는 소리

가끔씩 소라껍질을 귀에 대어 보았습니다. ‘~~’ 깊고도 깊은 동굴 속의 바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뭔가 속 깊은 사연이라도 들려줄 것만 같았습니다. 너무도 신기해서 안을 들여다보면 반 뼘 깊이도 되지 않았습니다

고향 바닷가의 모래벌판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자그마한 게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지휘자는 따로 없었지만 모두가 하나인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두 집게발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흥겨웠을까요. 창조주를 찬양하는 봄의 제전이라도 벌어진 걸까요. 하늘과 바람과 파도가 춤곡의 악보였을까요. 외계인의 안테나를 닮은 두 눈으로는 우주와 소통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잊혀진 풍경, 그리운 풍경. 아마도 어른 속의 소년은 산에서 고향의 바다를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산수국은 수십 수백 개의 작은 꽃들이 모여 커다란 한 송이의 꽃을 이루게 됩니다. 작은 꽃 한 송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왕의 머리 위에 있는 화관(花冠)을 닮았습니다. 모여 있는 작은 꽃들 주변으로 맑고 고운 헛꽃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헛꽃들이 있어 비로소 완성되는 꽃입니다. 전체적인 모양새를 보면 곱게 단장한 여인네들의 부채춤을 닮았습니다. 바람이 쏴아 불 때마다 꽃들은 흔들흔들 뱅글뱅글 제자리걸음으로 부채춤을 출 것만 같았습니다.

 

첫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떠나온 고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