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89 / 벋음씀바귀

풀빛세상 2011. 5. 26. 17:57

 

   

 

 

씀바귀, 참으로 익숙한 이름입니다. 봄이 오면 나물 캐는 아가씨의 작은 대나무 바구니에는 쑥 냉이 씀바귀 등등의 푸른 풀들이 한 가득 담겼겠지요. 아무리 뜯고, 아무리 캐도, 없어지지 않는 풀꽃들었지요. 보릿고개를 넘어가기가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보릿가루 한 줌을 풀어넣은 풀죽으로 꼬르륵거리는 배를 채우며 살았기에 쑥 냉이 씀바귀 등의 이름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서러움이기도 했었지요.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오염되고 비만해진 육신을 다스리는 건강식품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씀바귀도 종류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갯가에서 짠물을 머금으로 자라는 갯씀바귀, 잎이 무척 작은 좀씀바귀,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벋음씀바귀, 선씀바귀, 벌씀바귀, 흰씀바귀...... 언제쯤이면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이런 다양한 씀바귀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찍어 올린 이 사진을 찾아보니까 벋음씀바귀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지요. 모임이 있어 달려간 곳에는 작은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한 가운데는 모래밭을 만들었고, 애들이 좋아하는 여러 놀이기구들을 비치했습니다.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그늘지게 했으며, 어른들을 위한 벤치가 있었고, 귀퉁이에는 작은 풀꽃들의 세상도 펼쳐졌지요. 그곳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씀바귀의 작은 왕국이 있었습니다. 와~ 씀바귀다. 저것을 찍어야겠다. 그 다음날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저쪽에는 공공근로를 나오신 어르신들이 풀밭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차근 차근 눈에 도드라지는 모든 풀들을 자르거나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낫을 든 할아버지들과 호미를 든 할머니들이 지나간 자리는 깔끔해지고 있었습니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어 이곳 저곳 열심히 찍고 있으니 저쪽에서 크게 웃으시며 주고받는 말들이 들려왔습니다. 사람은 안 보고 꽃만 찍고 있다는 그분들의 대화 속에서 여유로움과 웃음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분들에게는 풀꽃들을 찍고 있는 제가 무척 흥미로웠겠지요. 싱거워진 저도 그분들을 바라보면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여기 이것들이 참 예쁘네요.

 

두어 시간 지난 후 그 자리를 다시 찾았을 때 주변은 너무도 깔끔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잔디들보다 웃자란 모든 것은 사라졌습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다사롭고도 부드러운 봄바람에 흥이 겨운듯 까닥거리며 인사했던 황금빛의 씀바귀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조용하고도 평화로웠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저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잠시라도 마음 들뜨게 했었던 풀들과의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답니다. 다행히 뿌리는 파헤치지 않았으니 때가 되면 다시 돋아나겠지요.

 

사진을 찍을 때, 다시 그곳으로 찾아왔을 때, 그 짧은 순간에도 참 많은 생각들이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풀밭 정리를 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부탁이라도 해 볼껄. 이 부분만이라도 그냥 두시라고. 이런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처음부터 작업지시를 내리는 분들이 현장을 일일이 살펴보고 '이런 풀꽃들은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라고 할 리가 없겠지요. 감사한 것은요, 이런 가운데서도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고 조용합니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내년이면 또 다른 꽃들이 그 자리에 피어날 것입니다. 누군가가 다시 찾아와서 쓰다듬어 줄 것이요, 누군가가 찾아와서 잘라낸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잘려나가는 풀꽃들에 아쉬움을 느끼는 풀빛세상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