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77 / 자주괴불주머니

풀빛세상 2011. 4. 14. 13:03

 

 

 

 

 

엊그제 뉴스입니다. 한국의 초일류 ㅅㄹ호텔의 부페식당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분이 입장을 거절당하여 결국 뒤돌아 나왔다고 합니다. 뒤돌아 나왔다는 말은 쫓겨나왔다는 뜻이겠지요. 이유인즉, 한복은 치맛단이 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소맷단이 넓기 때문에 차려놓은 음식에도 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답니다. 그 회사의 규정에 의하면 츄리닝과 한복을 입은 분은 입장거절이라고 되어 있답니다. 그런데 일본의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은 환영을 받으면서 입장을 한다네요.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허허 웃으면서, 그 식당은 당나라 식당이냐, 아니면 왜식당이냐, 정체성이 뭐냐, ㅅㄹ호텔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쓴소리들을 쏟아내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그 호텔의 사장님이라는 분이 내쫓긴 분을 찾아가서 죄송합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하지만...... 정체성과 전통을 잃어버린 서글픈 시대의 정신적 빈곤을 보게 합니다.

 

옛날 아녀자들이 고운 한복 차려입고 나설 때에 괴불주머니라는 장신구를 매달아 다녔다고 합니다. 괴불주머니, 괴불, 괴불, 몇 번 외어보면서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라는 느낌이 찾아들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원래 괴불이란 오래된 연(蓮) 뿌리에 서식하는 열매의 이름인데, 벽사(辟)를 뜻한다고 합니다. 벽사란 요사스런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뜻이겠지요. 요즘이야 미신이라고 하겠지만, 옛날 역병도 많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살았던 시절에는 사악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작은 장신구 하나에도 사람들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자주괴불주머니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먼 곳 깊은 산골이 아니라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자박자벅거리는 길 옆, 얕은 언덕, 밭둑, 심지어는 집 곁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꽃들도 사람의 눈길과 손길과 정이 그리운 걸까요? 흔하기도 하고 특이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에 쉽게 지나치고 말지만 어떻게 하면 이 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오가는 길에 잠시 잠시 차를 멈추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찍어보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들은 흔하게 피어있는 이 꽃의 이름을 괴불주머니라고 했습니다. 꽃의 모양이 옛날 아녀자들과 어린애들이 달고 다녔다던 괴불주머니와 비슷하기 때문이겠지요. 자주색이니까 자주괴불주머니요, 산에서 피는 것은 산괴불주머니, 염주모양의 씨앗주머니를 맺으면 염주괴불주머니 등등으로 이름들이 나누어지지만 꽃의 모양은 다들 비슷합니다. 어쩌면 이 꽃을 보면서 사악한 것들은 물러가고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원을 아뢰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또 다른 멋스러움이 느껴집니다. 뭐랄까요? 아지랭이 아른아른 봄날을 즐거워하는 종달새의 종알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수없이 달려있는 그 많은 꽃들 중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예쁘지요.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라면 '어쩜 이렇게 예쁠까' 감탄이라도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전통이 뭉개지는 세상에 감수성인들 온전히 남아있을라고요.

 

 

오늘날 우리들을 괴롭히는 요사스러운 귀신을 뭘까요? 괴불주머니 꽃을 보면서 며칠간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정리를 해 보려고 하니 한없이 글이 길어질 것만 같고, 제 머리는 어질어질 해지며, 마음에는 통증이 몰려들 것만 같습니다. 중국 하늘에서 몰려올 황사비, 일본의 원전으로부터 몰려올 방사능비, 그리고 체르노빌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괴생물체들, 거대한 지렁이, 괴물 메기 등등...... 그리고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변화 등등...... 어쩌면 이런 것들도 지엽적인 것일 수 있겠지요.

 

더 무서운 것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요? 신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인간들의 오만성이 아닐까요? 지혜와 지식과 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지성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신념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고요, 과학문명의 발달이 오히려 지구적 재앙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달려가는 그 길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앞에 장미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기 때문일까요? 개인의 이기심이라는 탐욕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요사스런 귀신이 현대인들에게 뭔가를 덧씌웠기 때문일까요? 안돼요. 가는 길 멈추지 않으면 망해요. 아무리 외쳐도 귀를 열고 듣는 이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겠지요. 브레이크 없는 열차를 타고 쏜살같이 내리막길을 달려가고 있는 지구호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괴불주머니, 이 작은 꽃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얘들아, 밖에는 작은 꽃들이 무리지어 피었단다.

꽃들의 깔깔거리는 작은 웃음들이 들리지 않니.

꽃들에게 희망을, 이것이 풀빛세상의 작은 구호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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