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73 / 봄날의 동백꽃

풀빛세상 2011. 3. 25. 12:10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을 읽는 순간 뭔가 속마음을 들켜 버린 듯한 당황함과 함께 헛웃음을 헛헛 속으로 웃어보는 것은 어느 특정인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겁니다. 모두에게는 첫사랑이 있고, 첫사랑의 아린 아픔들이 있고, 살아가면서도 남모르게 살풋살풋 스쳐가는 정념(情念)들이 있겠지요. 여기서 이게 좋으냐 나쁘냐의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할 수는 없겠지요. 김용택 시인이 이 글을 적었을 때가 1998년이요 쉰의 나이를 넘겼을 때였으니.....

 

제가 궁금한 것은 이런 글이 어디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 쉰의 나이를 넘겼어도 어떻게 이런 감성이 살아 있느냐는 것이겠지요. 영화 '시(詩)'를 보면서 김용택 시인의 맑은 얼굴과 낭랑한 목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맑지 않으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없겠지요. 속붉음을 이렇게 노골적이면서도 깔끔하게 그러면서도 읽는 우리들에게는 '그래 맞아 맞아' 하면서 무릎을 치게 하는 것에서, 그분의 시심 깊음을 부러워하며 탄복하게 됩니다.

 

옛날 미학(美學)을 강의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매주 한 번씩 어둠침침한 카페에 예닐곱 명이 모여 머리 맛대고 진지하게 그분의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신들의 누드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세속적인 감정이 아니라 일종의 숭고미(崇高美)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그 그림들이 비록 여체를 그렸다고 하지만 실제의 여체가 아니라 수학적으로 계산된 비례와 균형을 찾아서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이 땅 위의 세상에 옮겨 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아~ 아름답다'라는 느낌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선운사의 봄에는 붉고 붉은 동백꽃이, 가을이 되면 시뻘겋게 타오르는 꽃무릇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스님들이 도를 닦는 도량(道場)의 앞마당 뒷마당에 온통 붉고 붉어 불타오르는 꽃들만 심어 키웠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붉고 붉은 인간의 속마음을 불심으로 풀어 내라는 뜻이었을까요? 아직 저는 선운사의 꽃무릇도 동백꽃도 본 적이 없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곳을 찾아 차마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세속적 인연들을 어떻게 종교심으로 승화시켜 올렸는지 느껴보고 싶습니다.

 

잠시 봄날의 속붉은 동백꽃 앞에서 맑은 시심과 승화된 종교심을 생각해보는 풀빛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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