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67 / 설중동백

풀빛세상 2011. 2. 14. 19:05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는 동강은 쓰올 곳이 없느니다

 

() 타고 꺼질진댄 애제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으니다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님의 '사랑'이라는 글입니다. 한 젊은 시절에 이 글도 늘 외고 다녔지요. 이 글을 읽고 욀 때마다 가슴이 뜨뜻했습니다. 그러면서 열정있는 삶을 살리라, 삶을 불태워도 아깝지 않을 그 무엇을 찾겠노라고 바둥거렸습니다. 그 당시 삼중당 문고라는 포켓 문고가 있었습니다. 일명 손바닥 문고라고도 불렀지요. 꼭 손바닥 크기요, 포켓에 집어넣으면 작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당 2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대학생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지요. 노산 선생님의 글 뿐만 아니라 영랑, 소월, 목월, 지훈, 이상.... 등등의 한국 시집들 뿐만 아니라, 엘리엇, 보들레르 등등의 시들도 애송했었지요.

 

가슴이 뜨거우면 살고 머리가 뜨거우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의료적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였겠지요. 갓난 아기들이 참 많이 죽었답니다. 애타는 엄마가 열이 펄펄 끓는 아기를 방구석 따뜻한 곳에 뉘어 놓고 제발 살아나기만을 손 비비면서 기다렸습니다. 입이 마르고, 입술이 타고,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만이 촉촉 흘렀겠지요. 이때 아이의 머리에서 열이 내리고 심장 박동이 폴짝폴짝 뛰면 애가 살았다고 안심을 했다지 않습니까? 지켜보던 엄마의 입에서는 한숨이 포옥 나오면서 긴장이 풀려 스르륵 주저앉았겠지요.

 

이제 세월이 흘렀습니다. 가슴의 열기는 식어지고 머리의 이성만이 남은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인생의 속 알멩이는 비어가면서 껍질만 단단해지는 것은 아닌가, 고집과 아집만 늘고, 뼈다귀와 해골만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릿한 아픔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날까지 살아온 것이 의미요, 아들 딸 이만큼 키웠으니 그것이 남은 것이 아니냐고도 하지요. 듣고 보면 그럴 듯해서 고개를 끄덕여도 봅니다만, 젊은 날의 진붉었던 울음들은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의문이 뭉글뭉글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하얀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겨울의 동백꽃이 눈을 하얀 뒤집어 썼습니다. 차를 세우고 몇 컷을 얻었습니다. 백설동백(白雪冬柏)이 이토록 뜨거운 줄 몰랐습니다. 가까이 가면 가슴이 데일 것만 같으네요. 몇날 며칠 동안 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동백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성경귀절의 한 부분입니다. 노래들 중의 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을 가진 '아가서'(Song of Songs)의 한 부분이지요. 여기에서 백합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순백의 꽃이 아니라, 중동지역의 골짜기에 피는 붉은 나리들이라고 합니다. 험한 골짜기의 작렬하는 태양빛 하늘 아래 가시나무 틈을 비집고 붉은 빛을 흩뿌리는 나리꽃의 열정을 상상합니다. 그 열정으로 하늘을 섬기며 살아야 하겠지요.  하늘의 그분도 땅으로 내려와 붉은 피를 뚝뚝 떨구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추운 겨울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겠다고 작심한 걸까요? 유난히 춥고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만, 그 한 가운데 눈맞은 동백꽃이 젊은 날의 열정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젊은 날의 방향 몰랐던 열정이 아니라, 이제는 한 곳을 향하여 남은 힘을 모두어 달려가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