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63 / 배풍등

풀빛세상 2010. 12. 29. 15:31

 

 

  

 

 

 

겨울이 되면 들판은 심심해지기 시작합니다. 초록의 계절이 품고 있었던 온갖 풀꽃들의 와글거림도 사라지고, 벌판에는 시든 풀잎들의 서걱이는 소리들만이 바람결을 타겠지요. 이럴 때 들판에는 세찬 바람을 즐겁게 맞이하는 억세의 춤사위가 벌어집니다. 바람이 잦아들면 조용히 숨을 고르다가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얼쑤 좋다 얼쑤 좋다 온 몸을 바르르 바르르 떨며 춤을 추겠지요. 

 

이럴 때 잡목 우거진 곳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는 열매들을 찾아보는 것도 행복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볼 때, 꼭 만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꽃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꽃들은 그 순간을 놓치면 일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꽃 하나를 찾겠다고 매일 시간을 낼 수도 없고, 어쩌다가 발에 걸리면 그 순간의 기쁨으로 이렇게 외치지요. 야~ 너 또 만났구나. 때로는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풀꽃을 만나게 되면 기쁨이 배가 되지요.

 

배풍등의 꽃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흔한 꽃인 것 같지만 의외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도심의 한 중앙에 살다가 외곽지의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해마다 올려받는 임대료를 감당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이삿짐을 옮긴 그 다음날 주변을 관찰했습니다. 옆 골목길에는 시들은 풀과 자잘한 잡목들이 엉켜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배풍등의 발간 열매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날씨가 개기를 기다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찾아가 찍고 또 찍었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꼭 만나고 싶은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배풍등 뿐만 아니라 알꽈리의 붉고 영롱한 열매도 눈에 아른거립니다. 꼭 만나야지, 꼭 사진으로 찍어야지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엊그제는 눈이 쌓인 산길을 헤치면서 혹시라도 남은 것이 있을까 찾아봤지만 흔적도 없었습니다. 11월 중순께에 찾아야 하는 것들을 12월의 말경에 찾아 만나겠다는 욕심이 지나친 것이겠지요. 눈이 녹으면서 질퍽거리는 산길에 발만 적시고 말았습니다.

 

배풍등, 줄기식물입니다. 참 순하고 순한 줄기를 요리조리 타고 오르내리면서 앙증맞고 작은 꽃을 피워내지요. 꽃이 사라지면 여인의 귀걸이 같은 초록의 열매들을 조롱조롱 맺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붉게 변해가지요. 반투명의 반짝거리는 열매를 보면서 '영롱하다'는 단어를 떠올려봅니다.

 

또옥 따다가 여인의 귀에 걸면 매우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목걸이로 만들어 봉실한 여인의 가슴골 위에 늘어뜨려도 좋은 것 같네요.그런데 제 아내는 귀걸이 같은 것으로 치장 할 줄을 모르니...... 그래서 제가 편하기는 합니다. 아직 저에게 한 번도 반지 하나 해 달라고 조른 적이 없거든요. 하기사, 풀꽃들은 좋아해도 인공의 보석에는 아무 관심도 취미도 능력도 없이 살아가는 목석같은 남편에게 뭘 요구하겠습니까? 저는 뭐~ 할 말이 없으면 하늘만 쳐다보지요. 자연 속에 진짜 보석들이 숨어 있잖아 하면서 말입니다.

 

어쩌다가 보석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옛날 옛적 한 옛날 저와 아내가 결혼을 앞두고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보석집에 들렀지요. 밝은 진열대 안에 있는 루비 반지와 목걸이가 너무 영롱했습니다. 와~ 예쁘다. 그리고 아내의 목에 걸고 손가락에 끼었지요. 그렇게 시작은 했지만, 아내는 그것들을 몇 번이나 목에 걸고 손가락에 끼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 둘 다 멋에는 서툴기만 하거든요.  

 

늦가을 초겨울이면 붉은 보석으로 빛나는 열매들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쓸쓸해질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되겠지요. 제가 아무리 무딘 남자라도 왜 보석에 마음이 없겠습니까? 단, 인공의 보석이 아니라 자연의 보석에 마음이 빼앗겼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겠지요. 다행인 것은, 아내도 이런 남편을 한 번도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면서도 미안할 따름이지요.

 

아래 사진은 옛적에 찍어 놓았던 배풍등의 꽃입니다. 꽃도 특이하게 생겼지요. 저는 저 꽃을 보면서 앵~~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커다란 벌을 연싱했습니다.

 

자연 속에 있는 보석들을 찾아보는 풀빛세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