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51 / 어저귀

풀빛세상 2010. 11. 18. 15:30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꽃들의 세계에서도 왕을 뽑는 대회가 열렸답니다. 꽃들의 왕이니까 화왕(花王)이라고 해야겠지요. 요즘 말로 하면 미스 코리아 혹은 미스 유니버스를 뽑는 대회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다. 꽃들은 모두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대회장에 나왔겠지요. 어쩌면 자기가 피어있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심사위원을 맞이했을 수도 있겠지요. 장미는 화려함으로, 백합은 고고함으로, 양귀비는 요염함으로, 심지어는 호박꽃마저도 활짝 핀 자태를 뽐내었겠지요. 꽃들은 제마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자랑했을 것입니다.

 

어저귀라는 식물도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왕이 되지 못하자 스스로 왕관을 만들어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지요. 이를 알게 된 하늘의 신이 벌을 내려 머리에 올린 왕관을 시커멓게 만들어버렸답니다. 그 이후로 어저귀는 머리 위에 까만 왕관을 쓰고 다니게 되었답니다. 어쩌면 꽃들의 세계에서 놀림감이 되지 않았을까요?  

 

어저귀라는 식물은 참 많은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원래는 인도산이라고 하는데 줄기에 있는 섬유질을 얻기 위해서 들여온 귀화 식물이랍니다. 질긴 섬유질을 뽑아 곡식을 담는 자루를 만들었고요, 종이의 원료로도 사용했겠지요. 그뿐 아니라 요즘과 같은 약이 없던 시절에 어저귀를 달여서 마시면 설사가 멎었고요, 눈이 밝아졌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약재와 처방하여 열을 내리고 습기를 제하며(靑濕熱), 살균제로 쓰이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귀하신 몸으로 밭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지만 시대에 밀려 내버려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편리한 비닐 자루를 사용하면서 어저귀는 더 이상 쓰일 곳이 없어졌지요. 어디 어저귀만 그렇습니까? 옛날 어릴 적 커다란 밭을 하얗게 물들였던 목화송이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요, 삼베를 얻기 위해서 심었던 대마(大麻)도 사라졌고요, 그 외에도 없어진 것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이제 어저귀는 더 이상 밭에서 볼 수 없습니다. 씨앗이 던져진 곳에 몰래 몰래 눈치살이를 하면서 뿌리를 내려 고달픈 세상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것을 정체성 혼란이라고 하나요? 시대는 무섭게 변해갑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내버려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따르기 위해서 아둥바둥거려야 합니다. 아무리 아둥바둥거려도 제 몫을 감당하지 못하면 내버려지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운다 한들 공허하게 들려질 때도 있겠지요.

 

정체성의 혼란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냐는 원초적인 물음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과연 무엇이 다르냐는 혼란스러운 질문이기도 하겠지요. 옛날 교과서에 따르면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겪는 혼란이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나는 변한 것이 없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어제의 나는 더 이상 귀하신 몸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아픔의 하소연으로 들려집니다.

 

다행히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했다고 한들, 그 고달픔이 없어지겠습니까? 시대의 급류에 정신없이 휩쓸려 가면서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어지겠지요. 그렇지만 다행한 것은, 신은 사람 마음에 따스함과 여유로움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붙들어 주려고 하는 이타심이라는 마음도 주셨습니다. 메마른 세상을 헉헉거리며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방긋 웃는 풀꽃들의 웃음도 주셨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이런 내용의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빠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빠, 아빠 노릇하기 참 힘들지요. 아빠가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냐, 네가 있으니까.....

 

어저귀, 이제는 우리 가까이에서 쉽게 볼 수 없게 되어버린 풀꽃입니다. 옛날 옛적에 있었다는 전설을 안고 풀숲 어딘가에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켜갈 뿐입니다. 한 때는 귀하신 몸, 그러나 이제는 시대에 밀려 자기의 자리에서 내쫓겼습니다. 그렇지만 풀꽃들의 세상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왜냐고요? 풀꽃세상 자체가 희망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