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40 / 나비나물

풀빛세상 2010. 10. 30. 15:25

 

 

 

가을의 산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나비나물입니다. 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옛날 봄처녀들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부드러운 새순을 뜯어 바구니에 담았겠지요. 꽃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진을 보면 마주 보는 초록의 잎 두 장이 나비가 날개를 벌려 날아가는 듯 날렵하지 않습니까? 자주색이 강하게 도는 꽃들도 나비가 나무가지에 매달려 파닥거리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대구에 살 때였습니다. 교회에 시인이요 한학자였던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정년의 나이를 넘기시기는 했지만 가끔씩 대학에 출강하셔서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찾아가서 뵈면 자신이 펴낸 시집들을 선물로 주시며, 옛날 문예잡지에 실린 자신의 글을 찾아 해석을 덧붙이며 읽어 주시기도 했지요. 한학자다운 고풍스런 단어들과 문장들이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항상 박목월 시인에 대한 추억담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한 때 목월 시인이 계성(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답니다. 한 번은 장학사님과 기타 참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시범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목월 선생님이 말을 더듬거리며 진땀만 흘렸습니다. 그 일에 충격을 받았는지 목월 선생님은 사표를 쓰고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답니다. 그분은 성품이 예민한 시인이었지 고등학생들에게 입시공부를 시키는 분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장로님은 목월선생님이 한 때 거처하셨던 한옥(韓屋)을 구입해서 잘 보존했습니다. 크지는 않았지만 기와를 올린 목조건물이었습니다. 대청마루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고, 그곳에는 석류나무와 장미넝쿨이 어우러졌지요. 대구의 시내 한 복판이었는데 어쩌면 지금쯤 주인을 잃은 집은 헐어지고 그 대신 현대식의 묵직한 시멘트 건물이라도 들어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야 목월선생의 추억이 서린 곳이니 잘 보존해도 좋으리라 생각되지만 자본의 횡포라는 것이 그대로 놔두기만 하겠습니까?  

 

가끔씩 이 분에 관한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고령에 있는 고향의 골짜기에 자그마한 한옥 한 채를 구입해서 ㅇㅇ재라고 현판을 달았습니다. 배산임수라, 뒤로는 얕으막한 산들이 둘러싸고, 옆으로 흘러가는 작은 실개천에는 사시사철 맑고 고운 물이 졸졸 흘러내렸습니다. 앞으로는 시원하게 탁 트인 풍경에 벼들이 자라고 있었지요.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그 분은 고향 문중에 묻혀있는 조상님들의 문집들을 찾아 번역하여 편찬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가리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가벼운 영혼은 날개를 달고 날마다 꿈에 그리는 ㅇㅇ재로 달려갔겠습니다만, 노후에 치매라고 하는 불청객이 찾아와서 그분의 맑고 고운 영혼을 갉아먹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일평생 세상에 어울릴 줄도 모르고, 친구를 친하는 일에도 서툴렀고, 오직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리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셨는데, 폭 좁게 살았던 인생살이의 후유증이었을까요? 너무 세상을 곱게 살아도 그것이 병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도 그분을 존경합니다. 탁한 세상을 맑고 곱게 사셨기에, 품 안에는 항상 소망을 품고 있었기에, 찾아오는 이에게 항상 넉넉한 마음을 나누어 주셨기에.....  

 

나비나물의 꽃을 볼 때마다 날개죽지에서 초록색의 두 날개가 돋는 듯 합니다. 맑고 고운 영혼이 두 날개를 파닥이면서 어딘가로 날아갈 듯 하지 않습니까? 어디로 가볼까요? 동화의 세상, 요정들의 세상, 무엇보다 풀빛이 아름다운 풀꽃들의 세상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가을입니다. 가을의 억새밭으로 날아갈까요? 단풍이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저 산으로 달려갈까요? 잠시라도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높이 높이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추억과 꿈과 소망의 풀빛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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