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36 / 꽃향유

풀빛세상 2010. 10. 26. 17:16

 

꽃향유

 

 

 

 

그 옛날 천재라고 불려졌던 학생들의 학교가 있었습니다. 전국 4대 명문교, 모의고사 성적 전국 최고. 재수 삼수까지의 통계를 포함하지만, 서울대학 100여명, 부산대학고 250여명, 그리고 4년제 대학 진학률 99%. 삼십 몇 년 전 또래 집단 중 단 5%만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학칙이 엄했던 그 옛날, 수십 년 학교 전통에서 처음으로 퇴학과 유기정학과 무기정학이라는 징계를 단 한 명도 받지 않았던 3년 무사고 학생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반복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사회에 나가면 지도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 열심히 해라.’

 

졸업생들의 면면도 화려하기만 합니다. 벌써 별을 달고 장군에 진급한 친구들이 대여섯 명이 됩니다. 지방법원의 부장판사, 변호사, 행정고시 외무고시 합격자들, 수십 명의 교수와 연구요원들, 수십 명의 초중고 교사들, 중견기업의 회장님과 사장님, 대기업의 이사님, 경찰서장,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의사와 약사.... 그리고 목사님과 스님과 신부님도 있을 것이고, 시인과 성악가와 화가.... 그리고 사회 각계 각처에 흩어져서 대부분 제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을 수밖에 없겠지요. 친했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반이 갈리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소식을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 그 친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루는 반의 분위기가 술렁거리며 학급 임원들이 어딘가로 다녀왔습니다. 일년 윗 선배로 건강이 몹시 나빠 한 해를 쉰 후 복학을 한 학우가 결국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학생들은 학우의 장례식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쉬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반에 좌우로 책상 두 개가 치워졌습니다. 한 명은 건강이 나빠져서 휴학하게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신경쇠약으로 휴학하게 되었습니다. 쉬고 싶었던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들 용기가 없었고, 그래도 견딜만 하니까 견뎠겠지요. 대학에 가서 후유증을 앓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폐인, 연락두절..... 어느 누가 스트레스를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힘든 싸움에서 지쳐갔고, 환경이 뒷받침을 못해 주었을 것입니다.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모두 같은 나이의 중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오를 곳이 남아 있어 열심히 뛰는 친구도 있겠지만,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이제는 내려올 준비를 해야 하는 친구도 있을 것이며, 복잡한 세상에서 헉헉거리는 친구들도 제법 있을 것입니다. 동창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병으로 혹은 사고로 사망했다는 친구들도 여럿 보입니다.

 

천재라고 불렸던 학생들의 비애,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의 허무를 소년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소박한 풀꽃들의 세상에 눈이 머물고 마음을 빼앗기면서 오늘도 내일도 풀빛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는 걸까요? 풍진세상(風塵世上)의 명리(名利)가 덧없기만 하기에.

 

제주도에는 꽃향유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다른 꽃들은 차례로 숨어버렸는데,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메마른 들판에 씩씩하게 피었습니다. 저 붉은 분홍의 열정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스하게 하리라고 결심을 한 걸까요? 보는 이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려는 걸까요?

 

찬 바람의 들판에서 더욱 꿋꿋함을 배우는 풀빛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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