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33 / 주홍서나물

풀빛세상 2010. 10. 22. 17:00

 

 

 

주홍서나물

꽃보다 아름다운 씨앗

 

지난 며칠간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신학교수님을 모시고 '현대세계의 위기 앞에 선 인간'이라는 주제로 신학강의 및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나이 45세가 되어야 죽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부터는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짧아지기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나이 지긋하신 노교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친구가 이런 말로 자기의 견해와 함께 해석을 덧붙여 줍니다. 인생은 고개마루를 넘어서 목적지로 향하여 가는 것과 같아서, 중년이 되기까지 부지런히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다가, 중년의 고개를 넘어서는 순간 저 앞에 보이는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중년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슬며시 찾아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간간히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의 추억들을 반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부터는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부끄럽지 않은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장이라는 말보다는 성숙이라는 말이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요즘 웰-비잉(Well-being)이라는 단어가 널리 유행하고 있습니다. 웰-비잉을 우리 말로 번역하여 해석하면 '행복하고 건강한 생활'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혹은 '인간다운 삶의 질의 회복'이라고 해석해도 될까요? 웰-비잉 음식, 웰-비잉 식탁, 웰-비잉 주거공간 등등 우리 삶의 곁에 가깝게 다가온 단어입니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등장한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웰다잉(Well-dying)입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만큼 죽음의 순간도 중요하다는 뜻으로 최근에 도입된 단어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는 것만큼 노년의 기간이 길어지고, 그 노년의 생활이 항상 건강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래 사는 것만큼 고통의 기간도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품위있게 죽을 권리가 주어져야 하겠지요.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아름다운' 혹은 '행복한' 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이는 것이 어색한가요? 아니면 고개가 끄덕여지는가요?

 

이제 늦가을입니다. 꽃들은 하나 둘 꽃잎을 떨구고 그 자리에 씨앗들을 남기는 결실의 계절에, 꽃보다 아름다운 씨앗을 맺는 주홍서나물을 소개합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식물입니다. 나물이라는 단어가 붙었으니 어린 잎을 뜯어다가 살짝 데쳐서 반찬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꽃을 찾아보면 저 아랫쪽이 바알간 주둥이 하나가 보입니다. 저기에 햇살이라도 비치게 되면 꼭 담배불이 연상되어 담배풀인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좀 뭔가 부족한듯 여겨집니다만, 그래도 꽃은 꽃입니다.

 

하얗게 솜털이 뭉쳐졌습니다. 저 솜털 하나 하나가 하늘 높이 둥둥 날아가면서 새로운 풀빛세상의 영역을 꿈꾸게 됩니다. 가능한 황폐하고 척박한 땅이면 더 좋아합니다. 삶과 죽음, 성장과 성숙, 그리고 인생의 고개 마루에 올라선 중년의 가을, 낙엽 휘몰아가는 바람소리 앞에서 조용히 영원을 응시해 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씨앗을 찾아보는 풀빛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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