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23 / 당잔대

풀빛세상 2010. 10. 8. 17:16

 

 

 

 

 

 

 

백약이 오름, 백가지 약초가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육지에 가면 뒷동산 정도밖에 안 되고, 숲이 무성하거나 내가 졸졸 흐르는 것도 아니고, 밋밋하고 평퍼짐한 외모에 커다란 분화구 하나를 안고 있을 뿐인데, 그 속에 백가지 약초를 품어안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제주 오름의 신비이지요.  

 

제주 생활 10년을 살았어도 그곳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안내하는 분이 있어 찾아갔으나 입구에서부터 비가 좌락좌락 내려서 되돌아오고 말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 위치를 알았으니 혼자라도 찾아가리라 마음 다잡고 짬을 내어 달려갔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9부 능선까지 올라갔다가 비를 만나 되돌아 오고 말았습니다. 백가지 약초를 품어 안고 있어 아무에게나 품을 열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죄가 많거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오름의 입구에서부터 많은 풀꽃들이 피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벗어나는 순간 평소에는 풀이 흐르지 않는 실개천변에 탐라황기와 야고가 있습니다. 쥐꼬리망초, 산박하, 깨풀, 아직도 혼동되는 쥐깨풀과 들깨풀, 닭의장풀, 나비나물, 등골나물, 하얀 색의 뚝갈, 쑥부쟁이들, 산오이풀, 그 외에도 이름 모르는 풀과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늦은 계절에 이만치 만났으니 다른 계절에는 훨씬 더 많은 식물들이 자라며, 더 많은 풀꽃들이 시차를 두면서 피고 지기를 반복하겠지요.

 

위로 올라가면서 잔대가 이곳 저곳에서 흩어져 피었습니다.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것 저것도 찍어보면서 좋은 모델을 찾아보는 중 언덕 위쪽에서 눈에 띄는 모델이 있었습니다. 사진 찍기 좋게 주변을 대충 대충 정리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습니다. 미안하단다. 너희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제일 좋겠지. 누군가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겠지. 그래도 아저씨가 오늘 좋은 작품 만들어줄께.....

 

집에 와서 정리하여 동호회에 올렸습니다. 당장 지적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섬잔대가 아니고 당잔대라고 해야 하며, 그 앞에 있는 큰 잎은 꽃과는 상관없는 것이지요라고 했습니다.

 

아차. 이왕 정리할 거, 앞에 있는 제비꽃의 잎까지 치웠어야 했는데, 작은 정에 얽매였다가 작품을 망치고 말았네. 앞에 있는 커다란 이파리 하나로 인해서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사라졌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요, 평가하기 나름이겠지만, 밖으로 내보이기에는 불편한 사진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는 이 장면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곳을 찾아가더라도 이미 모든 것이 변해 있을 것입니다. 좋은 모델 하나 만나기 정말 어려운데......

 

아무리 욕심 없이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이런 경우를 만나면 아쉬움만 가득 남게 됩니다.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이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시와 때와 정성과 그리고 온갖 지식과 기술이 하나로 집약될 때, 비로소 작지만 괜찮은 작품이 하나 나오겠지요. 어쩌면 옛날 고려청자와 여러 가지 백자를 빚어내었던 도공들도 아쉬움과 미련이라고 하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조금씩 높은 경지로 올라섰겠지요. 그러면서 그네들은 파쇄의 고통들을 스스로 감당했다고 하던데, 저는 이 사진 하나가 아쉬워서 변명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자연은 쉽게 그네들의 품을 열지 않으네요.

자연이 감동하여 품을 열고 안아 줄 때까지 우보걸음으로 달려갑시다.

풀빛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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