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163 / 중의무릇

풀빛세상 2014. 3. 14. 19:59

 

 

  

 

 

풀꽃 이야기 163번째입니다.

원래 이 블로그는 풀꽃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사진도 찍고 글도 적고, 그러면서 풀꽃들을 매개로 해서 이웃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만들었지요.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 번 찍고 글로 표현해 보았던 꽃님들을 다시 찍게 되면서 '풀꽃의 짧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3500 종류의 꽃이 피는 식물이 있다고 하는데, 160여 종류를 겨우 글로 옮겨 보았다면 감히 풀꽃을 알았노라고 말할 자격도 없겠지요. 그나마 얼치기로 알기만 하니. 

 

오늘은 오래간만에 긴 호흡의 글로 중의무릇이라는 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차거웠던 겨울이 지나고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계곡의 따스한 곳에서는 부지런한 꽃들로 소란스럽지요. 하얀 눈을 녹이며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있고, 그리고 어딘가에는 아주 아주 작고 앙증맞은 노오란 흰괭이눈이 눈을 살포시 뜨게 됩니다.

이때쯤 수풀 틈새 어딘가에서 수줍은 듯 꽃잎을 벌리는 노란별의 꽃이 있지요.

중의무릇이라고 합니다.

이 꽃은 굉장히 늦잠꾸러기인지, 다른 꽃들이 모두 활동을 시작한 후 해님이 중천에 떠오를 때쯤이면 겨우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깨어납니다. 달리 말해서 전형적인 해바라기 꽃에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는 절대로 만날 수 없고, 적어도 오전 10시가 넘어가면서 해가 쨍하게 뜨는 날에 만날 수 있겠지요. 여섯 장의 노란 꽃잎. 여섯 개의 노란 꽃술, 그래서 영어로는 '베들레헴의 노란별'(yellow star of Bethlehem)이라고 합니다.

 

무릇이라는 말은 '물웃'이라는 옛말에서 유래했으며, '물'은 '물'(水)이요 '웃'은 '위'를 뜻하기 때문에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요. '중의'라는 말이 붙었으니 불교와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만, 정확하게 어떤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깊은 산속에 있는 절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연결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뿐입니다.

 

한국에는 불교와 관련된 꽃들이 여럿 있습니다. 서양이라면 당연히 기독교와 관련지어서 이름을 짓게 되겠지요. 여하튼, 스님들이 도를 닦으며 수행하는 절주변에도 여러 종류의 꽃들을 심었겠지요. 가장 대표적으로 잎과 꽃이 절대로 만날 수 없다는 상사화를 비롯해서, 같은 종이로되 붉음이 터져 나오는 꽃무릇이 있을 것이요, 그 외에도 붉은 동백꽃들도 심었겠지요. 세속의 미련을 끊고자 할수록 마음의 미련은 더하기 때문에 일부러 붉은 꽃들을 심어서 시름을 달랬을까요?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던 종교가 타락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라서 천대받게 될 때도 있겠지요. 불교의 수행자를 스님이라고도 하고 중이라고도 합니다. 문외한인 저로서는 전후를 헤아릴 수 없으되, 사회통념상으로 이해한다면, 스님은 왠지 높임말 같고, 중이라면 천시된 느낌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중이라면 아마 중생을 계도한다는 뜻에서 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면서, 결코 천한 말은 아닐 터인데 왜 천시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게 됩니다.

 

꽃들 중에서 중의무릇, 중대가리풀, 중대가리나무들은 전형적으로 스님을 낮추어 부른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석장풀이나 지장보살과 같은 꽃은 호의적인 뜻이 들어있겠지요. 그 외에도 불교와 관련된 꽃들이 어디 한 두 종류이겠습니까?

 

이제 추운 겨울도 지나고, 꽃샘추위들이 심술을 부리고 있지만, 어길 수 없는 계절은 다사로운 봄기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풀숲 어딘가에 노란별꽃으로 피어나 작은 세상을 불밝히고 있는 중의무릇을 만나는 날이면 마음이 밝아지고 다사로워지지요.  

그러면서 생각해 봅니다. 종교가 제 기능을 감당하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중생을 계도하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빛과 소금이 되고, 그래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