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이야기

풀꽃이야기 174 / 수박풀

풀빛세상 2014. 8. 25. 15:10

 

 

 

 

 

오래 전, 똑딱이 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의 이야기이지요. 밀감밭 한 귀퉁이에 손바닥만한 텃밭을 만들고 고구마 몇 이랑을 심었습니다. 그것도 농사라고 틈틈히 돌아보는데, 어느 날 땅에 깔린 고구마 줄기 위로 우뚝 솟아 한들거리는 하얀 꽃들이 보였습니다. 참 아름답다. 무슨 풀꽃일까? 수박꽃이 아니라 수박풀이었습니다. 여름의 과일 수박의 잎과 비슷하다는 뜻이겠지요.

 

그 후 몇 년이 지나면서 드디어 DSLR 카메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수박풀의 꽃을 찍고 싶었습니다만, 한 해 농사를 끝으로 고구마밭은 자잘한 폐기물을 쌓아놓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파란 하늘 흰 구름을 배경으로 수박풀꽃을 찍어야할텐데. 작은 소원이 간절함으로 변해갔지만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꽃들은 아니었습니다. 해마다 두리번거리며 찾았습니다. 멀리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는 그런 심정일까요? 찾아야지. 만나야지. 멋지게 찍어줄테야.

 

어떤 해는 어느 지점에 수박풀꽃이 있더라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이미 제초제가 뿌려져 모두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 아쉬움과 허탈.... 어느 날에는 잠시 모습을 드러낸 꽃을 만날 수는 있었지만 무성한 풀숲에 짓눌려 있는 너무 외로운, 너무 애초로운 모델이었기에 아쉬움만 남았지요.

 

작년에 제대로 만났습니다. 야생화를 찾아 혼자 헤매다가 우연히 들어간 밭에서 여러 그루 여러 송이의 꽃을 만났지요. 그러나 너무 새파란 하늘, 텅 비어버린 하늘의 무게에 연약한 꽃들은 눌려버렸지요. 아쉬웠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실 부근의 묵은밭에서 여기 저기 수박풀의 흔적을 만났으나 꽃들은 지고 씨방들만 내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씨라도 받아야겠다. 화단에 심어서 좋은 모델을 만들어야지. 내년에는 꼭 빛난 하늘에 뭉개구름을 배경으로 너를 품어야겠다. 그리고 내년에도 이 밭에는 분명 많은 꽃들이 피어나겠지. 장소를 알았으니...

 

해가 바뀌었습니다. 사무실 가까운 곳의 묵은 밭은 일구어져 모든 풀꽃들은 사라졌습니다. 주인은 트렉터로 갈아 엎고 제초제를 뿌린 후 그들이 원하는 작물의 씨앗을 뿌려놓았습니다. 그나마 화분에 씨를 뿌려 키운 것 중 몇 그루가 자라 꽃을 피웠네요. 아쉽게도 부드럽고 파란 하늘, 하늘 한 귀퉁이를 당당하게 흘러가는 뭉개구름, 그리고 나풀거리는 노랑나비 호랑나비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회색의 구름이 하늘에 쫙 깔린 흐린 날, 혹은 비가 토닥거리다가 잠시 멈춘 순간에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고 정성을 다해 몇 컷을 담았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게 뭐 대단하다고. 특별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네.

사랑에 빠져 들뜬 마음으로 중얼중얼거려본 사람들은 제 심정을 알겠지요.

요리 봐도 예쁘고 조리 봐도 예쁘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사랑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사물들은 다르게 보인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