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속의 이야기

풍경 속의 이야기 1 / 수족관 안의 문어

풀빛세상 2011. 1. 21. 15:46

 

 

 

 

그네는 풀꽃 에세이만 적지 말고 풍경 에세이도 적어보라고 합니다. 풍경을 찍고 길고 짧은 이야기들을 산뜻하게  혹은 날카롭게 적어가는 분들이 어디 한 두 분이어야지요. 제가 감히 그 속에 끼어 한 줄을 덧붙인들 그분들과 나란히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 이 땅의 작고 소박한 풀꽃이나 사랑해야지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은 풍경 속에서 느껴지는 감상들을 길고 짧은 이야기들 속에 녹여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지요. 뭐랄까요? 본업은 따로 있지만 .......

 

수족관의 문어들을 찍어보았습니다. 큰바다 너른 곳,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그 밑바닥에서 자유롭게 노닐어야 할 것 같은데, 그곳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즐겨야 할 것 같은데, 좁고 좁은 방에 갇혔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겠지요. 고놈 차암 맛있겠다고 하겠지요. 어쩌면 제가 맛볼 수 없는 쐬주 한 잔을 생각하면서 기분이 얼큰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제 마음 속에는 안쓰러움이 물밑들이 밀려들까요? 아릿한 아픔들을 들쑤시면서 묵은 상처들까지 들추어 낼까요?

 

해물탕을  맛있게 한다는 식당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낮고 넓은 냄비에 각종 해물들과 야채들을 가득 쌓아 올려놓았습니다. 그 속에는 여러 종류의 조개들, 소라, 새끼전복 등이 싱싱한채로,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겠지요.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생명으로 충만한 문어 혹어 혹은 낙지가 길다란 발을 이곳 저곳으로 내뻗으며 눈알까지 데룩데룩 굴리고 있습니다. 밑에서는 시퍼런 가스불이 솟아나고 있는데요.....  

 

위에 있는 사진을 보면 꽤나 산만하고 복잡합니다. 작고 비좁은 수족관 안에는 고향을 잃은 문어새끼들이 뒤엉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들어가 있네요. 승합차가 한 대 들어 있습니다. 전봇대도 있고요. 가로수의 가지들도 보이고요.... 그 외에도 바깥 세상의 여러 가지가 풀어 낼 수 없는 암호문처럼 뒤엉키면서 숨어있네요. 현실과 꿈, 현상과 혼동, 기억의 저편 세상이 펼쳐진듯,  아름다움으로 포장한 세상의 뒤켠에 있는 불유쾌한 장면들이 뒤엉켜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나라고 하는 혼돈된 존재의 가장 정직한 내면의 모습일까요?  

 

엊그제 들려온 인터넷 뉴스 한 토막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살처분되는 어미소의 모정이라고 제목이 붙었던 것 같은데요. 살처분시키는 주사를 맞은 어미소 곁에 철없는 갖난 송아지가 젖달라고 보채었다지요. 온 몸이 뻗뻗하게 굳어가는 어미소가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뻗대면서 애기소에게 젖을 물렸답니다. 만족할만큼 젖을 빤 송아지가 떨어지는 순간 어미소가 쿵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지요. 그 순간에도 아기소는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전혀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했고요. 그 송아지도 살처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어미소 곁에 묻혔다는 서럽고도 진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온갖 상념들이 뒤엉켰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살아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살처분의 살벌한 일들이 왜 펼쳐져야 할까요? 그러면서 왜 나치주의자들에 의해서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만행들이 떠오를까요? 엄마 곁에 묻힌 아기소는 행복했을까요?

 

첫 이야기부터 너무 무거워졌습니다. 진지함을 버리고 가벼움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아직도 저는 무거운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짊어지고 가는 것 같으네요. 언제쯤이면 저도 가벼움으로 날개를 달고 세상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까요? 작은 수족관이 대양처럼 넓어져서 자유롭게 헤엄쳐 다닐 수 있을까요?

 

너른 세상에서 답답함으로, 좁은 세상에서 초월을 꿈꾸며 살아가는 풀빛세상이었습니다.